*레오의 2세와 엄마인 모브녀가 등장합니다. 불편하신 분은 뒤로 가주세요.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게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때는 그것이 사랑인 줄 모르고 지나칠 확률은? 그 사랑을 십여 년이 지난 후 그와 똑 닮은 아이를 보고서야 깨달을 확률은? 하지만 그 상대는 자신의 존재조차 기억하지 못할 확률은?
세나 이즈미는 자신이 운이 좋은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별나게 운이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은 딱히 없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모든 극악한 확률을 깨고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게 된 오늘, 이날까지는.
세나 선생님, 레오군이랑 결혼해주세요
w. 플라티나
과거, 츠키나가 레오는 유별난 성격과 특이한 행동으로 교내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문난 괴짜였다. 등교도 착실히 하지 않고 드물게 학교에 나왔나 싶으면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다. 대신 교내 여기저기를 신출귀몰하게 돌아다니며 온갖 곳에서 악보를 그리고 인스피레이션이니, 우주인이니, 외쳐대고 다녔으니 그 존재감만큼은 남달랐다. 남들에게 관심이 없는 세나 이즈미마저 그 존재를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반면 세나 이즈미는 키즈 모델을 출신이라는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로 저 츠키나가 레오를 능가하는 유명 인사였다. 어디를 가나 시선과 소문이 따라붙었고 그 정도는 츠키나가 레오의 경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자신이 튀기를 원하지 않아 비교적 얌전한 학창 생활을 보냈기 때문에 등교도 잘 하지 않던 츠키나가 레오는 세나 이즈미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여하튼 성향부터가 완전히 정반대였던 두 사람이니만큼 고등학교 2학년, 열일곱의 레오가 학교를 그만두기 전까지 그들 사이엔 연결고리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츠키나가 레오 본인마저도 기억하지 못할, 오로지 세나 이즈미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작은 인연을 제한다면 말이다.
완연한 겨울로 들어서기 직전의 11월 말, 차분히 내리던 가을비가 온 세상을 적막으로 물들이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비가 온 탓인지 갑자기 내려간 기온에 아침부터 몸이 으슬으슬했다. 차라리 그때 집에 돌아가 쉬었다면 금세 괜찮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모델이었을 적, 컨디션 난조를 숨기던 습관은 그리 쉬이 버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조퇴를 한다면 더욱 눈에 띌 것을 걱정한 이즈미는 평소와 같이 허리를 바르게 피고 앉아 종일 수업을 듣고 마지막 체육 수업에선 열심히 몸을 움직이기까지 했다. 그런 상황에서 같이 당번을 맡은 아이가 중요한 볼일이 있다며 내일 벌충하는 대신 오늘은 일찍 돌아가도 되냐는 물었다. 그리고 이즈미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기를 부렸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단둘이 남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 일을 떠맡는 것이 더 편했다.
비 오는 방과 후, 대부분의 운동부도 비 때문에 오늘은 일찍 귀가하였고 덕분에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교실에서 혼자서 남겨진 이즈미가 당번 일을 끝마칠 즈음엔 아침보다 확연히 몸 상태가 나빠져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젠 보는 눈도 없었기에 이즈미는 아침 등굣길에 사 온 마스크를 뜯었다. 하얀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챙겨온 목도리도 둘둘 둘러매고 우산을 쓰자 자신이 세나 이즈미라는 걸 쉽게 알아챌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중무장을 하고서야 교정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먀옹, 미야옹. 학교 근처의 작은 놀이터를 겸한 공원에서 가냘픈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작은 울음소리 따위, 처음부터 듣지 못했더라면 몰라도 듣게 된 이상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울음소리를 더듬어 다다른 곳은 펭귄 모양의 미끄럼틀 아래 빈 공간이었다. 허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응? 뭐야, 배가 고픈 건가? 미안하지만 먹을 건 들고 있지 않다구. 와하하핫!”
이미 누군가가 고양이를 먼저 발견해 돌봐주고 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제가 굳이 끼어들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목소리의 주인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 이즈미는 결국 우산을 접고 그 작은 우주 안에 발을 들이밀고 말았다. 그런 이즈미의 발소리에 바닥에 쪼그려 앉아있던 누군가가 고개를 돌렸다. 짙은 녹음과 청량한 푸름이 마주치자 어둡던 작은 공동空洞이 한순간 밝게 물들었다. 마치 환상과도 같은 기현상에 이즈미가 잠시 넋을 놓고 있는 동안 먼저 한자리 차지하고 있던 이가 종이 박스 안에 들어있던 고양이를 품에 안은 채 뒤로 물러섰다. 그 작은 움직임에 신기루처럼 환했던 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다시 어둠이 찾아들었다. 아무래도 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무믓?! 누구냐! 앗, 설마 우주인인가?!”
“…하아?”
아직도 얼떨떨한 상태에서 들린 황당무계한 말에 이즈미의 반응이 한 박자 늦게 터졌다. 그리고 지금 제가 마주 보고 있는 남자가 제가 평생 볼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 츠키나가 레오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귀여운 냥이를 데려가려고 나타난 거냐?! 그렇겐 안 되지! 우리 냥이가 얼마나 센데!”
두 손을 그러모으면 그 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새끼 고양이를 품에 끼고선 손으로 직접 고양이의 앞발을 쥐고 주먹을 내지르는 모습이 가소롭고 또 귀여웠다.
“장난은 그만 쳐.”
“장난이 아니라 나는 언제나 진지…, 응? 말이 통하잖아? 우주인은 외계어를 쓰는데? 그렇다면 너, 우주인이 아니구나?!”
“그거야 당연하지. 그보다 고양이 좀 보여봐.”
이즈미가 레오를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제가 차이고 있다는 자각도 없는지 레오는 눈을 반짝이며 이즈미를 올려다보곤 외쳤다.
“그럼 너도 냥이 울음소리 때문에 온 거구나?! 상냥하네~!”
꾸밈없는 칭찬에 조금 머쓱한 기분이 되어 이즈미는 레오의 눈을 피하며 부러 더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하지만 왜인지 평소처럼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어쩌다 보니 서로를 칭찬해주는 꼴이 되어버려 온몸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즈미는 어깨를 한번 부르르 떨고선 레오의 맞은편에 쪼그려 앉았다. 레오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종이 상자 안에 들고 있던 고양이를 놓아주었다. 그제야 이즈미는 고양이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주황색 털에 짙은 갈색으로 줄무늬가 수놓아져 있었고 말랑한 배와 네 발에는 하얀색 신발을 신고 있었다. 땡그란 눈이 깜빡거리며 이즈미를 바라보았는데 특이하게도 양쪽 눈의 색깔이 서로 다른 오드아이였다. 그중 왼쪽의 녹빛과 비슷한 색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사이, 고양이를 바라보던 이즈미를 빤히 쳐다보던 레오가 문득 말했다.
“…닮았네.”
“뭐가?”
“눈 색이. 예쁘다.”
그 대답에 고개를 든 이즈미의 시야에 밝은 녹색 눈동자가 아로새겨졌다.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였지만 그 눈동자엔 다정함이 담겨있었다. 그 풍모가 사랑스러우면서도 절대 약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아, 이 녹안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너야말로. 게다가 털마저 주황색이니까 나보다는 널 더 닮았지.”
흘리듯 중얼거린 이즈미가 고양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냉큼 이즈미에게 엉겨 붙었다. 이즈미는 왜인지 평소 동물들에게 그리 사랑받지 못하는 타입인데 이 녀석은 겁도 없는지 아주 거리낌이 없었다. 그 모습에 레오도 고양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레오의 손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모습에 충격받은 레오가 억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앗! 이 녀석, 아까까지 널 돌봐준 건 나잖아~! 이제 와서 이러는 건 배신이야!”
“이렇게 어린 애가 뭘 안다고 그래.”
아무렇지 않은 체 받아쳤지만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이즈미가 마스크 아래로 입꼬리를 말았다.
“그보다 대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던 거야? 아직 새끼니까 이렇게 추운 날 계속 밖에 있으면 안 될 텐데.”
“무뭇, 그건 나도 알지만 지금은 우산도 없고 우리 집은 부모님 때문에 동물은 안 돼서…. 적어도 비가 그칠 때까진 옆에 있어 줄까 했거든.”
“하아? 너 일기예보도 안 봤어? 이 비 내일까지 안 그칠 거야.”
“엑? 정말?! 그럼 냥이는 어떡하지?”
우산도 없이 어떻게 집에 돌아갈까 하는 고민보다도 고양이를 더 걱정하던 레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절대 싫거든?”
그런 레오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즈미가 선수를 쳤다. 일찌감치 튀어나온 거절의 말에 레오가 다시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여 고양이의 턱 밑을 간질여주었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레오의 손길을 받아들이던 고양이가 다시금 먕, 하고 울었다.
“아, 맞다. 얘 배가 고픈 것 같았는데. 어떡하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오르자 레오가 더욱 울상을 지었다. 그 표정에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얘는 대체 뭐야. 일부러 이런 표정 짓는 건가? 그치만 겨우 이 정도로 넘어갈 내가 아니라고……,
“…잠깐이라면 우리 집에서 돌봐줘도 괜찮을 것 같은데.”
“진짜?! 진짜로??”
“…이런 일에 거짓말은 안 해. 물론 길러줄 사람을 찾을 때까지 임시로 맡는 거지만.”
그 한 마디에 어둡던 레오의 얼굴이 환해졌다. 덕분에 주위가 조금 밝아진 기분이었다. 화사하게 웃어 보인 레오가 고양이를 번쩍 안아 들고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소리쳤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그치, 야옹아!”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먀앙, 하는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듯 레오의 웃음소리를 뒤따랐다. …내가 넘어간 건 저 표정 때문이 아니라, 저 녀석이 너무 서럽게 우니까. 그래서 그런 거라고. 이즈미는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조금은 후회하며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보는 사람이 다 어지러울 정도로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던 레오가 겨우 멈춰서자 이즈미도 따라 일어섰다.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엇, 괜찮아?!”
저도 모르게 비틀거린 이즈미를 레오가 급히 지탱하고는 이즈미의 이마에 손등을 댔다가 화들짝 놀랐다.
“열이 엄청나잖아?! 어떻게 지금까지 버틴 거야?”
“…아까까진 별로 안 심했어.”
이즈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하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어찌어찌 설 수는 있었지만 혼자 걷는 건 힘들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레오가 이즈미를 다시 주저앉게 하고는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제 가방을 들었다. 빈 종이와 무언가가 잔뜩 써진 종이들로 가득한 가방을 뒤집어 털어내곤 그 안에 조심스레 고양이를 집어넣었다.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자, 야옹아.”
그리곤 제 가방과 이즈미의 가방을 양쪽 어깨에 메고선 이즈미가 접어둔 우산을 챙겨 들고 이즈미를 이끌었다. 미끄럼틀 아래의 낮은 입구를 거의 기다시피 하며 빠져나와 큰길로 나가 무작정 택시를 잡았다. 다행히 지나가는 택시가 많아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집 주소 기억나?”
“…아무리 아파도 내가 우리 집 주소도 모를까 봐?”
이즈미가 느릿한 목소리로 불러준 주소를 향해 택시가 움직였다. 레오가 이즈미의 목도리를 고쳐 매주곤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레오가 이즈미보다 작은 탓에 그리 편한 자세는 아니었지만 이즈미는 그것을 불편하다 여길 정신도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 집에 도착했는지 레오가 부산스레 몸을 움직이는 게 느껴져 이즈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부딪히는 빗방울 때문에 흐릿한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주택이 보였다. 레오가 이즈미를 택시에서 내리게 하고는 물었다.
“집에 부모님은 있는 거지, 세나?”
내 이름은 어떻게…. 그 물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대문 옆 명패에 생각이 미쳤다. 레오가 이즈미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대문을 열고 현관 앞까지 다다르자 레오는 이즈미의 가방과 우산을 다시 이즈미에게 들려주려다가 이내 문 옆 벽에 기대 서 있는 이즈미를 보고 우산과 가방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곤 제 가방을 열어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고양이를 꺼내려다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저리 아파 보이는 사람에게 고양이까지 떠맡겨도 될까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 몸이 아프다고 스스로 입 밖에 낸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고양이, 이리 줘.”
그럼에도 선뜻 고양이를 넘기지 못하는 레오에 결국 이즈미는 제 손으로 고양이를 빼앗아 안았다. 덕분에 쓸데없이 체력만 더 쓴 것 같았다. 이즈미의 팔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고양이를 잠시 바라보며 미소짓던 레오가 이내 허리를 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야옹이 잘 부탁하고!”
그리 외치곤 맨몸으로 바깥으로 튀어 나가려는 레오의 머리 꽁지를 이즈미가 붙잡았다.
“아야야야! 왜 그래?”
별로 세게 당기지도 않았는데 괜히 엄살을 부리는 레오를 향해 이즈미가 말했다.
“…우산.”
“응? 아아,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깐 괜찮아.”
“방금 택시 보내버렸잖아. 다시, 잡으려면 걸어 나가야 되는데….”
레오의 머리를 놔준 이즈미가 고양이를 안지 않은 손으로 옆에 세워진 우산을 레오에게 건넸다.
“줄게. 쓰고 가.”
“빌려주는 게 아니고?”
“언제 돌려받을 줄 알고…. 그냥 주는 게 마음 편하지.”
이즈미가 빈정거리듯 말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별 의미가 없었다. 그에 레오가 환히 웃으며 이즈미의 우산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나중에 꼭 돌려줄게!”
그러니깐 돌려줄 필요 없다니까. 이즈미가 대답하기도 전에 레오는 우산을 펼치고 쏜살같이 장대비 속으로 뛰어들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통통 좌우로 춤추듯 흔들리며 멀어지는 레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즈미는 레오의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현관문을 두드렸다. 레오가 열쇠를 손에 쥐여주었지만 직접 열 힘도 없었다. 곧이어 문을 열어준 마마의 놀란 목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그리고 이즈미는 며칠을 앓아누웠다. 잠깐씩 정신이 들 때면 간신히 죽과 약을 먹고선 다시 기절하듯 잠들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언제나 작은 울음소리가 곁을 지켰지만 이즈미는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조차 없어 다만 그 울음을 자장가 삼아 꿈속을 헤매었다. 아주 지독한 열병이었다.
며칠 뒤 끝나지 않는 악몽에서 깨어난 이즈미가 마주한 광경은 이미 제집과 부모님에게 완벽히 적응해 어느새 레오라는 이름까지 지어진 새끼 고양이였다. 이즈미가 비몽사몽간에 중얼거린 레오의 이름에 고양이가 반응하면서 그것이 고양이의 이름인 줄 착각한 이즈미의 부모님 덕분이었다. 저보다도 더 고양이를 귀여워하는 부모님에 새로운 주인을 찾아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결국 그들은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이즈미는 다시 학교에 나갔다. 레오가 고양이의 안부를 궁금해할 것 같았지만 겨울방학이니 시험이니 하는 행사들로 어수선하던 분위기 속에서 레오를 찾기란 요원했다. 덕분에 분위기가 가라앉고 학기가 모두 끝날 때까지도 이즈미는 레오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곤 2학년이 된 얼마 후 츠키나가 레오가 자퇴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다. 그 소문에 대한 이즈미의 반응은 ‘거봐, 내가 우산 못 돌려받을 줄 알았다고.’ 정도가 다였다. 레오가 만날 수 없게 된 이후, 레오와의 유일한 기억은 때때로 불쑥 떠올라 이즈미를 덮쳐오곤 했다. 그것을 단지 고양이 레오군과의 첫 만남 때문일 거라 치부하며 츠키나가 레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도 동창회가 열릴 때면 항상 빠지지 않고 무언가의 괴담이나 전설처럼 츠키나가 레오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물론 정작 레오와 연락이 닿는 이는 없었다. 그러던 와중 동창들 중 누군가가 호기심에 레오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던 이였으니 시간이 흘렀어도 금세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츠키나가 레오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했다. 덕분에 그에 대한 무수한 추측과 무성한 소문만이 츠키나가 레오가 이곳에 존재했었음을 증명했다.
미국의 나사에 가서 우주비행사가 되었다느니, 본명을 감춘 채 유명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느니…. 심지어는 해외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어딘가에서 객사한 게 아니냐는 황당무계한 추측이 가장 가능성 있어 보인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 정도로 베일에 싸여있던 츠키나가 레오의 안부를 알고 있는 것은 아마 세나 이즈미가 유일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알게 될 것이었다면 평생 모르는 편이 나았으리라. 하필이면, 이런 식으로….
*
황혼빛 머리칼과 녹색 눈동자. 매섭게 치켜 올라간 눈매와 짤따란 눈썹, 얇은 입술과 그 사이로 덧니처럼 튀어나온 뾰족한 송곳니. 사랑스러운 풍모와 작은 덩치에도 누구도 쉽사리 얕잡아볼 수 없는 어엿한 육식동물.
이런 묘사를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사용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그 누군가가 어린 여자아이라면 더더욱. 아니, 그보다는 은연중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 여겼기에 앞으로 누구에게든 이런 감상을 가질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러분. 오늘은 새로 오신 선생님을 소개할게요!”
츠키나가다. 츠키나가 레오와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저 아이는 분명 츠키나가였다. 주먹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에 손톱이 박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보다는 심장이 더 지끈거렸다. 감정을 죽여야 했다. 그건 제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이니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세나 이즈미입니다. 키노시타 선생님이 돌아오기 전까지 달님 반 담임 선생님이 될 거예요. 잘 부탁해요.”
이즈미는 츠키나가에게로 기우는 자신의 시선을 부러 다른 곳으로 고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소개를 했다. 이전 동료 교사가 이즈미의 키즈 모델 시절 과거를 캐내고 끈질기게 달라붙더니 끝내는 거의 스토킹 수준으로 쫓아다니는 걸 피해 3년이나 다닌 유치원을 그만둔 뒤 반년 만에 겨우 구한 새 직장이었다. 이사까지 하며 옮겨온 곳에서마저 또다시 소란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저 아이가 츠키나가 레오와 어떤 관계든 앞으로 서너 달만 지나면 저 아이는 졸업을 할 테니 그동안만 조심하면 된다. 설령 저 아이가 정말로 츠키나가 레오의 아이라 하더라도 한낮에 끝나는 유치원 하원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나오는 것은 대부분 엄마들이었으니 저가 레오를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당연하게도 생각했다.
“레오군~!”
“루시~!”
그리고 그런 이즈미의 예상은 그날 오후 바로 빗나갔다. 다른 아이의 옷가지와 가방을 챙겨주고 있던 이즈미의 귓가에 익숙한 이름과 잊었다 생각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따라갔다. 저를 향해 달려드는 어린아이를 능숙하게 받아내어 번쩍 안아 드는 남자의 모습. 두 쌍의 노을빛 머리통이 마치 두 개의 태양 같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루시. 오늘도 재밌게 놀았어? 뭐 특별한 일은 없었구?”
“오늘 선생님이 새로 왔어!”
“아, 키노시타 선생님 출산휴가 때문에 새로운 선생님이 오신다고 그랬지?”
남몰래 츠키나가 부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즈미는 제가 이야기의 주제에 오르자 몸을 움찔 떨고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체 제 앞의 아이를 챙겨주는 데에 몰두하려 했다.
“응! 이름은 세나 선생님이구 음, 엄청 이쁘다?”
“오오~. 우리 루시가 예쁘다고 칭찬할 정도라 이거지? 어디, 레오군도 세나 선생님한테 인사 좀 하고 갈까?”
그러나 자꾸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제게 인사를 하겠다는 말까지 나오니 도무지 무시할 수 없어 이즈미는 하는 수 없이 다른 선생님에게 아이를 맡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아, 세나 선생님이다!”
그런 이즈미를 발견한 루시가 이즈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레오와 이즈미의 눈이 마주쳤다. 이즈미는 긴장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며 담담한 척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세나 이즈미입니다. 루시 아버님이시죠?”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설마 저를 알아보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단 몇 시간, 방과 후 어둡던 학교 근처 공원에서 얼굴마저 마스크로 가린 채 겨우 대화 몇 마디 한 사이일 뿐이었다. 인연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짧은 만남을 저 츠키나가 레오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 기억하고 있었다면 그리도 간단히 학교를 그만두고 사라지진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건, 너무 오만한 생각일까. 하지만, 하지만… 내 눈, 네가 예쁘다고 칭찬했었잖아. 풀네임은 몰라도 세나라고, 네가 이름을 불러줬잖아.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한 우산을 먼저 돌려주겠다고 한 건 너였잖아…….
“아…, 남자 선생님 맞으시죠?! 루시 말만 듣고 여자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서 잠시 놀랐네요.”
그리고 그런 이즈미의 기대를 보란 듯이 저버린 레오가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티 없이 환한 웃음이 원망스러웠다. …아니, 기억한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어. 정신 차려, 세나 이즈미.
“루시 아빠, 츠키나가 레오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잘 부탁드려요!”
뭐야, 따라 하지 말라구~! 싫~어! 서로 투닥거리면서도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분명 보기 좋은 흐뭇한 장면일 터인데 보는 내내 예리한 칼끝이 심장을 저미는 기분이었다. 루시를 안고 있던 레오가 루시를 내려주며 대신 손을 잡고선 말했다.
“그럼 이제 가보겠습니다~. 루시도 선생님께 인사하자.”
“세나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오~.”
“그래. 내일 또 보자. …아버님도.”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루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이즈미는 레오에게도 눈인사를 했다. 레오도 눈을 접어 웃으며 이즈미에게 눈인사를 건네고는 루시와 함께 등을 돌렸다. 나란히 걸어가던 루시가 할 말이 있는지 맞잡은 손을 당기자 레오가 시선을 돌렸다. 그럼에도 루시가 여전히 손을 당기자 아예 몸을 숙여 루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제야 까치발을 한 루시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속삭였다.
“레오군. 세나 선생님 진짜루 이쁘지?”
“응?”
하지만 속삭임이라고 하기엔 아직 목소리가 컸다. 당황한 레오가 슬쩍 이즈미의 눈치를 보더니 이즈미가 안 들리는 척 몸을 돌리자 그제야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아, 맞아. 진짜 예쁘시더라. 역시 내 딸, 날 닮아서 눈 한번 높다니깐~?”
때를 놓친 사랑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별생각 없이 뱉었을 의미 없는 말에 멋모르고 떨리는 심장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다시는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이 사랑을 깨닫지 않아도 됐을 텐데 어째서 나는…….
격랑 하는 마음을 억누르며 이즈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않을 것처럼, 아주 오래도록.
*
츠키나가 레오와 아빠.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쓰일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아마 이즈미뿐만이 아니라 츠키가나 레오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예상외로 루시 아빠, 레오는 완벽했다.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집안 사정으로 남자 혼자 아이를 키우면 어디에서든 티가 났다. 적어도 이즈미가 지금껏 겪은 바로는 그랬다. 하지만 루시의 얘기를 들어보면 레오는 혼자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하는 모양이었는데 남자 혼자 애를 키운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애를 셋이나 키워낸 원장 선생님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다른 학부모는 물론 동료 교사들 사이에서도 자주 화제에 올랐다. 유치원을 찾는 학부모 중 유일한 남자에 젊다 못해 어렸고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츠키나가 가家의 사정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이는 없었다. 결혼은 한 건지, 했다면 사별을 한 건지 아니면 이혼을 한 건지부터 혼자 애를 키우면서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애초에 일을 하고 있긴 한 건지, 기둥서방이 아니냐는 말까지. 온갖 가설과 추측만이 난무했다. 그런 점은 예전과 다름없었지만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츠키나가 레오 개인에 대한 소문이라기보단 ‘루시 아빠’에 대한 소문이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소문의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이즈미는 레오를 그저 루시 아빠로 대하는 것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었을까.
“루시를 데리러 왔는데요.”
누군가의 남편인 츠키나가 레오에 대해선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제아무리 루시가 레오만을 쏙 빼닮았다 해도 레오가 혼자서 세포분열이라도 했을 리는 없으니 당연히 루시에게도 엄마가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레오가 아닌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루시를 찾는 순간 이즈미는 뒤통수를 후려맞은 느낌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되물었다.
“…루시 어머님이신가요?”
“네. 그런데요.”
이즈미는 얼른 표정 관리를 하고 루시의 겉옷과 가방을 챙겨주며 힐끔 낯선 여자를 살펴봤다.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칼과 이목구비가 진한 이국적인 외모의 화려한 미인. …저런 취향이었구나. 이즈미는 뒤에 붙은 쓸데없는 감상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한번 휘젓고 루시를 엄마에게 데려다주었다.
“마마!”
“얘, 그러다 넘어진다.”
루시가 엄마에게 달려들자 그녀가 피식 웃어 보였다. 쌀쌀맞은 인상이어도 예쁜 미녀가 웃기까지 하니 더욱 보기 좋았다.
“그럼 갈까? 저녁으로 맛있는 거 먹자.”
“좋아! 아, 그전에 선생님한테 인사!”
루시가 제 엄마의 손을 붙잡고 이즈미를 향해 배꼽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그래. 겨울 방학 잘 보내고, 또 생일 미리 축하한다.”
이즈미가 손을 흔들어 인사하자 루시도 마주 흔들며 제 엄마의 손을 이끌었다. 그녀는 이즈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루시를 차에 태워 곧 유치원을 떠나갔다. 내일은 크리스마스에 루시의 생일이니 온 가족이 다 모여 외식이라도 하는 걸까…. 속이 끓었다. 이혼이니, 사별이니 하던 얘기들은 전부 헛소문이었나보다. 아니, 아니지. 헛소문이든 아니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즈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상념을 몰아냈다.
크리스마스가 뭐 대수고, 츠키나가 레오가 뭐 별거냐. 약속은 없지만 저에게도 집에서 기다려주는 이는 있었다. 오늘부터 새해까지는 휴가이니 느긋하게 집에서 함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그 힘으로 제 할 일을 모두 해치우고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유치원을 나와 집 근처의 마트에 들려 저녁 만찬용 재료들을 골랐다. 마지막으로 분위기 내는 용으로 도수가 낮은 달달한 샴페인까지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니 아주 완벽한 퇴근길이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에 대한 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괜찮았다. 한동안 일을 쉬느라 종일 집에만 있던 이즈미가 다시 일을 시작한 이후로 계속 삐져서 최근에는 이즈미가 퇴근 후 돌아온 직후에도 아무런 반응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해졌다.
“아주 왕님이 따로 없다니깐. 레오군~. 어디 있어?”
메에웩. 그러나 돌아오는 답이 무언가를 토해내는 소리뿐이라면 그건 당연하지 않았다. 이즈미는 코트를 벗다 말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실 한구석에서 구토를 하고 있는 주황색 줄무늬 고양이의 등을 두드렸다. 제가 없는 사이 뭐라도 잘못 주워 먹은 걸까 싶었는데 겨우 그 정도가 아닌 모양인지 더 이상 게울 것이 없는데도 헛구역질을 하는 모습에 이즈미는 결국 현관문을 박차고 나섰다. 하지만 집 근처에 봐뒀던 동물병원은 왜 하필이면 오늘 문을 닫았는지. 왜 하필이면,
“어? 세나 선생님, 맞죠?!”
또 이럴 때… 널 만나는 건지.
병원 앞길 한복판에 멈춰서서 휴대폰으로 정신없이 다른 병원을 찾고 있던 이즈미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사만 하려고 잠시 차를 멈춰 세운 레오가 창백하게 질린 이즈미의 얼굴에 놀라 허겁지겁 차에서 내렸다.
“왜 그러세요?! 어디 아파요?”
“아뇨, 제가 아니라 고양이… 고양이가.”
이즈미의 떨리는 목소리와 이동장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그 뒤편의 굳게 잠겨있는 병원을 차례로 확인한 레오가 이즈미를 제 차의 뒷자리에 실었다.
“근처에 다른 병원을 아니까 데려다 드릴게요!”
아직 이 근처 지리를 잘 모르는 이즈미로선 거절할 수 없는 호의였다. 그렇게 레오의 차를 타고 도착한 다른 병원에 진찰을 받자 스트레스로 인한 급성 위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 말에 안심했지만 한편으론 더욱 미안해졌다. 내가 좀 더 신경 써줬어야 하는데…. 미안해, 레오군. 혹시 몰라 수액주사를 맞히고서 병원을 나오자 그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저를 기다리던 레오가 보였다.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만 해도 충분한데 진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기까지 하다니. 감사의 인사라도 건네려 레오에게 다가가는 순간, 그제야 레오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감색 정장과 매끈한 검은색 구두, 짙은 회색의 코트까지.
그곳에 있는 것은 후드티에 면바지 같은 캐쥬얼한 옷만 입던 ‘루시 아빠’가 아니라 ‘츠키나가 레오’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 문득 심장이 뛰었다.
“아, 세나 선생님!”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레오가 이즈미를 발견하고서 손을 흔들며 차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에 정신을 차린 이즈미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뇨, 여기까지 데려다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죄송한데 데려다주실 필요는 없어요!”
“에이, 제가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니깐 마지막까지 바래다 드려야죠. 게다가 이사 오신지 얼마 안 됐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집까지 돌아가게요?”
…그 말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이즈미는 얌전히 다시 레오의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는 사이 레오가 시동을 켜며 물었다.
“집 주소가 어떻게 돼요?”
언젠가 들었던 익숙한 질문. 마치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잠시 떠오른 옛 기억에 추억에 잠긴 이즈미는 순순히 집 주소를 알려줬다.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한 레오가 곧 차를 출발시켰다. 잠시 방향을 잡기 위해 레오가 운전에 집중하자 좁은 차 안은 적막에 잠겼다. 그리고 조금은 어색한 그 공기를 레오의 목소리가 걷어냈다.
“그나저나 애는 어때요?”
“급성 위염이래요. 크게 아픈 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죠.”
“다행이네요. 애들이든 동물이든 한 번 아프면 정말 큰 일이니깐요.”
“그런데 용케 동물병원 위치를 알고 계셨네요. 동물 키우는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르는데.”
“이게 다 루시 덕분이죠, 뭐.”
루시가 병원 앞을 지나칠 때마다 유리창에 달라붙어 정신없이 동물들을 구경하는 걸 어르고 달래서 겨우 집까지 모시고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말하며 레오는 와하하 웃었다. 예전과 다름없는 웃음소리가 조금 서러웠지만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이제 열여섯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아무리 레오가 평소와 다르다 해도 그는 여전히 루시 아빠이자 누군가의 남편이었다. 저리 차려입은 것도 분명 가족끼리의 외식 때문일 테니 착각해선 안 됐다. 이즈미는 레오가 루시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며 저와 레오 사이의 거리를 다시 가늠했다. 유치원 교사와 학부모. 몇 달 뒤면 다시 보지 않을 사이. 그 정도가 딱 좋았다. 그 뒤의 대화는 대부분 루시에 관한 이야기였다. 애당초 그들 사이의 공통 화제라곤 루시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이즈미의 집이 점차 가까워졌다. 내비게이션과 이즈미의 안내로 이즈미의 집 앞에 도착해 차를 세운 레오가 몸을 돌려 이즈미를 마주 봤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얼굴 한번 못 봤는데 잠깐만 봐도 되나요?”
“아, 근데 얘가 낯을 좀 가려서….”
라며, 이즈미가 적당히 거절하기도 전에 이동장 안쪽에 몸을 말고 있던 레오냥이 철제망 사이로 코를 들이밀었다. 레오의 녹안과 레오냥의 오드아이가 마주쳤다. 아차 싶었지만 설마하니 사람인 저조차 알아보지 못한 레오가 이 녀석을 알아볼까 싶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레오냥의 오드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레오가 이즈미와 레오냥을 번갈아 살피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에 견디다 못한 이즈미가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럼 전 이만…,”
“잠깐, 잠깐만요!”
그러나 이즈미가 레오에게서 도망치는 것보다 레오가 이즈미를 붙잡는 것이 더 빨랐다.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더듬던 레오가 아!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쳐들었다.
“세나! 맞아, 분명 그런 이름이었어! 나 기억해?!”
“글쎄, 모르겠는데요.”
“거짓말!”
“기억 안 납니다.”
“기억하고 있었으면 먼저 알은체해 주지 그랬어~.”
레오가 무슨 말을 하든 모르쇠로 일관하려던 이즈미가 마지막 말에 결국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그랬으면 뭐, 어쩔 거였는데?”
“엣, 그야…….”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레오에 이즈미가 하, 실소를 흘렸다.
“거 봐. 네가 날 알아보든 내가 먼저 아는 척을 했든 변할 건 없어. 우리 사이는 딱 그정도였잖아?”
“그래도…! 그건 앞으로 변할 수 있는 거잖아!”
“이제 알 거 다 알 만한 나이잖아. 어릴 때처럼 제멋대로 뭐든 다 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루시 아빠와 세나 선생님 사이로 남자구요, 루시 아버님.”
방긋 웃는 얼굴로 선을 그은 이즈미가 제 팔을 붙잡고 있는 레오의 손을 직접 떼어냈다. 갈 곳 잃은 레오의 손이 허공을 맴돌던 그때였다. 먀앜, 작은 울음과 함께 이동장 사이에서 뻗어 나온 하얀 발이 레오의 소매를 잡아챈 것은. 마악 차 문을 열려던 이즈미가 멈칫했다. 풋, 입술 새로 새어 나온 레오의 웃음소리에 이즈미가 얼굴을 구겼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나랑 헤어지기 싫은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바쁘신 분을 붙잡고 있을 순 없죠.”
“에-, 나 약속도 없어서 내일 저녁까지 혼자라구~.”
“……거짓말.”
“내가 왜 세나한테 거짓말을 하는데?”
레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말하자 이즈미는 할 말이 없어졌다. 확실히, 레오가 저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잠깐 얘기하는 것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이브를 혼자 쓸쓸히 보낼 레오군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세나 선생님?”
일말의 희망에 잠시 마음이 술렁거린 틈을 타 레오의 은근한 목소리가 유혹하듯, 애원하듯 말했다. …거절하기 힘든 미끼였다. 하지만 그 기대가 어긋났을 때 받게 될 타격을 생각한다면 이즈미의 결론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즈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뱉기 전, 이즈미가 아닌 다른 곳에서 먼저 답이 나왔다.
먀아옹-. 먼저 미끼를 문 것은 또 다른 레오였다.
*
“와하하하! 너 진짜 엄청나게 성장했구나! 장하다, 장해!”
크리스마스이브의 저녁 시간. 어딜 가든 사람이 북적거릴 텐 데다 막 병원에 다녀온 레오냥을 혼자 두고 싶지 않던 이즈미는 결국 레오를 제집에 들였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이동장 문을 열자마자 밖으로 튀어나온 레오냥는 레오에게 들러붙었고 레오는 코트도 벗지 못한 채 레오냥과 놀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레오의 꼴을 뒤늦게 인지한 이즈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 너, 코트! 얼른 벗어!”
“에? 뭐, 무뭇?!”
잠깐 사이에 이미 레오냥의 털이 다 달라붙었지만 이제라도 코트를 사수하기 위해 레오가 당황하든 말든 당장 레오의 코트를 벗겨낸 이즈미가 돌돌이로 털을 떼어냈다. 다행히 금방 옷을 벗은 덕에 털이 많이 붙지는 않았다. 그 외에 다른 건 뭐, 천 한 장 남기지 않고 다 벗겨낼 수도 없으니 포기해야겠지만. 이즈미는 말끔해진 레오의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두고는 멍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레오에게서 정장 자켓마저 뺏어들었다. 자켓을 코트 옆에 가지런히 걸어두는 동안 레오의 시선이 이즈미의 뒤를 따라다녔다.
“…뭘 봐?”
“아니…. 세나가 이런 성격이었나, 싶어서.”
“하아? 이런 성격이고 저런 성격이고, 애초에 그런 걸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사이도 아니었잖아.”
“그치만 세나 선생님은 좀 더… 뭐랄까, 얌전해 보였거든.”
“공사 구분은 확실히 해야지.”
“응응. 그치만 어느 쪽이든 상냥한 건 여전하네~!”
레오가 배시시 웃으며 레오냥을 건드리며 덧붙였다.
“잠깐만 데리고 있을 거라고 했으면서 결국 이 녀석을 계속 키워주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거야, 주인이 될 사람을 찾아주는 것도 귀찮았고,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셨으니까….”
“뭐, 어찌 됐든 좋은 주인을 만났으니까 냥이한테는 잘된 일이지.”
이즈미의 대답 따윈 상관없다는 듯 혼자 결론을 내린 채 태연한 얼굴로 고양이와 놀아주는 레오의 모습에 조금 열이 받을 뻔했지만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레오냥과 눈을 맞춘 채 몸 여기저기를 간지럽히는 레오를 목격하자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대신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십여 년을 품고 있던 의문이 떠올랐다.
“…그렇게 신경 썼던 주제에 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거야?”
“웅?”
레오냥의 하얀 앞발에 볼을 짓눌리고 있느라 뭉개진 발음으로 반응한 레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즈미는 레오에게서 등을 보인 채 집을 나오기 전 어질러뒀던 장바구니를 정리하며 말했다.
“네가 마음먹고 찾으려고만 했으면, 아니. 적어도 네가 자퇴하지만 않았더라면 다시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세나가 책임지겠다고 말했으니까.”
“생판 처음 본 남이 한 말을 어떻게 믿고….”
“음…. 그치만 파팟 느낌이 왔는걸! 세나는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인 것 같다고! 그래서 딱히 걱정은 안 됐어. 근데, 있지….”
레오가 이즈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끝을 늘이다 찌르듯이 물었다.
“방금 그거, 누구 얘기?”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받아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이즈미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 눈에 띄게 당황한 티를 내버린 자신의 멍청함에 이즈미는 혀라도 깨물고 싶어졌다. 질문에 대한 답이 돌아오지 않자 어색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이즈미를 구해준 것은 레오냥이었다. 먘, 하는 울음소리에 레오가 고개를 숙이며 레오냥을 쓰다듬었다.
“아, 그래그래. 너한테 신경 안 써준다고 심통났구나?”
그런 레오냥에게 속으로 감사하며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넘어가려는 이즈미에게 레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얘 이름은 뭐야?”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이즈미가 움찔거렸다. 함께 구조한 고양이가 당사자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기묘한 상황에서 본인을 앞에 두고 납득시킬만한 이유를 급히 떠올릴 수 없었던 이즈미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님.”
“헤에~. 거창한 이름인걸? 안 그래, 왕님?”
최근에는 정말로 왕님이라고 자주 불렀으니까 꼭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 응. 제멋대로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레오와 레오냥이 뒹굴거리는 모습을 보니 왠지 양심이 찔려 이즈미는 급히 주방으로 도망치며 말했다.
“저녁 정도는 해줄게. 먹으면 바로 돌아가는 거다?”
“에에~? 세나는 구두쇠! 날 그렇게 내쫓고 싶은 거야?!”
레오가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지만 그보다 더한 투정쟁이들을 상대해오던 이즈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레오가 거실에서 고양이와 노는 것에 여념이 없는 동안 이즈미는 저녁을 준비했다. 마침 마음이 들뜬 탓에 혼자 먹기 곤란할 정도로 재료들을 사 왔기에 다행이었다.
이즈미는 육수로 쓸 국물을 먼저 끓이고 잘 다듬은 채소와 고기들을 겹겹이 쌓은 뒤 전골용 냄비의 가장자리에 차곡차곡 둘러주었다. 마지막으로 버섯과 청경채 등으로 가운데 빈공간을 채우자 냄비 안에 화려한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것을 만족스레 감상하곤 이전에 사용했었던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창고 입구에서 꺼내어 거실의 코타츠 위에 올린 뒤 냄비를 옮겼다. 그리고 푹 끓여두었던 육수를 냄비 위로 부었다. 이미 한차례 끓었던 국물이 금세 다시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그 잠깐의 틈을 타서 간단한 소스까지 뚝딱 만들어낸 이즈미가 레오를 부르기도 전, 진작부터 레오냥과 함께 코타츠에 몸을 밀어 넣고 자리를 잡은 레오가 눈을 반짝이며 이즈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나~! 대단하다! 요리 잘하는구나?”
“…너한테만큼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
이즈미는 달님 반의 그 누구보다 완벽했던 루시의 캐릭터 도시락을 떠올리며 레오를 흘겨봤다. 하지만 레오는 그런 이즈미를 못 본 척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제 눈빛에도 꿈쩍 안 하는 레오에 작게 한숨을 쉰 이즈미가 오늘 막 사 온 샴페인까지 꺼내온 순간 레오의 눈이 돌아갔다. 왠지 이즈미가 요리를 내올 때보다도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술 좋아해?”
“음, 엄청나게 좋아하는 건 아닌데 요즘 잘 못 마시다 보니깐. 루시가 있어서 저녁 약속은 꿈도 못 꾸고 집에서 혼자 맥주라도 마시려하면 루시가 술 냄새 난다고 싫어하는걸.”
레오가 몸을 꾸물꾸물 움츠리며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따끈한 코타츠 안에 들어가니 혀까지 녹아버린 것 같았다. 그런 레오의 다리 사이엔 레오냥이 들어가서 골골거리고 있었다. 이즈미는 국자로 레오의 접시에 야채와 고기를 골고루 담아주며 줄곧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근데 그리도 아끼는 루시쨩은 어쩌고 혼자인 건데?”
“무뭇, 세나도 오늘 봤을 거 아냐?”
“뭘?”
“루시 엄마 말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도 아니었건만 일순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만큼은 막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레오는 제 접시에만 집중하고 있던 터라 이즈미의 반응을 미처 보지 못했다. 레오가 접시를 받아들고 후후 바람을 불어댔다. 폴폴 올라오는 김이 레오의 얼굴을 흐리게 만드는 와중에 레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김이 제게 보이는 레오의 얼굴을 가려주는 만큼 레오의 시야도 가려주길 바라며 이즈미는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진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뭐가 말야?”
“루시 생일의 대부분을 자기가 혼자 차지하는 거 말이야! 아무리 내 얼굴이 보기 싫어도 그렇지, 루시 생일인데! 거기에 크리스마스인데!”
그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어서 뒷말을 듣고 싶었지만 레오의 입은 다른 일로 바쁜 탓에 말할 틈도 없어 보였다. 젓가락을 쥔 레오의 손이 고기와 채소를 듬뿍 집어 소스에 푹 적시고 와앙 벌린 입으로 집어넣었다. 이즈미는 마음속으로 참을 인을 그리며 인내심을 갖고 레오를 지켜봤다. 입 안 가득 음식을 물고 오물거리던 레오가 꿀꺽 삼키곤 말을 이었다.
“맛있다, 세나!”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참을 인 세 번 새길 시간에 그냥 살인 한 번 하고 말면 안 되는 걸까? 이즈미의 살인 욕구를 일깨우던 레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태평하게 샴페인 잔을 이즈미에게 들이밀었다. 이번에야말로 크게 한숨을 내쉰 이즈미는 샴페인을 따서 레오와 제 잔을 채웠다. 채앵-, 유리잔이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에 뒤이어 꿀꺽꿀꺽 샴페인을 원샷한 레오의 크으으, 하는 신음이 들려왔다. 아니, 대체 누가 샴페인을 원샷해? 어처구니가 없어진 이즈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레오의 빈 잔을 채워주는 사이 레오가 입을 열었다.
“있지, 세나. 나는 내가 평생 누군가의 부모가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 그냥… 평생 혼자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혼자서 죽지 않을까, 생각했거든.”
이번엔 또 무슨 말을 꺼낼지 기대도 않던 이즈미는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에 손가락을 꼼질 거리며 레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샴페인 한 잔에 취했을 리도 없건만 고해성사하듯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레오의 목소리에 물기가 느껴졌다면 그저 기분 탓일까.
“그런 내 생각이 단 하룻밤 만에 뒤집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 응. 딱 6년 전의 내일, 루시가 태어났던 밤의 얘기야.”
레오의 손이 흔들흔들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던 순간, 레오의 손목이 부드럽게 돌아가며 흘러넘친 술이 레오의 입술을 적셨다.
“우리 나이를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나, 사고를 좀 쳤거든. 루시 엄마랑은 여행하다 처음 만나서 오래 사귀지도 않았고, 정말 잠깐의 실수였어. 그래도 사고를 쳤으면 책임을 져야 하잖아? 그래서 애를 낳고 나면 결혼하기로 하고 루시 엄마랑 같이 살기 시작했는데 내 성격? 이라고 해야 할까, 생활 습관 같은 게 정말 웃길 정도로 너무 안 맞는 거야. 그래서 참다 참다 못 참은 루시 엄마가 가출은 한 거지. 그래도! 출산 예정일 한 달 전에 집을 나가서 한 번도 연락을 안 하는 게 말이나 돼?!”
말을 이어가다 보니 당시 생각이 나는지 울컥한 레오가 소리치듯 말했다. 이즈미는 말없이 술잔을 비우며 레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고 다시 연락이 온 게 루시를 낳고 난 다음이야. 루시 엄마는 이미 나한테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진 후인데 자기 애라고 나온 게 나만 쏙 빼닮았으니 억울하기도 하고 열 받기도 했나 봐. 그래서 나한테 떠맡기겠단 심보로 연락을 한 거지. 그 생각이 너무 괘씸해서 절대로 그 녀석이 원하는 대로는 안 해주겠다고 결심했어. 근데, 있지. 내가 루시를 처음 본 순간 그런 결심 따윈 눈 녹듯이 사라지더라.”
“…….”
“그리고 난 루시를 본 순간 확신했어. 루시는 신이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준 천사의 환생이라고!”
“하아?”
잘 나가던 이야기가 마지막 결론에서 삐끗 엇나가고 말았다. 진지하게 얘기를 듣고 있던 이즈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덕분에 조금은 엄숙하기까지 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밝아졌다. 레오는 다시 한번 샴페인을 원샷하고는 와하하하 크게 웃었다. 놀림당한 기분에 이즈미도 짜증스레 벌컥 술을 들이켰다. 하지만 목구멍을 타고 스며드는 열기가 되려 이즈미의 짜증을 부추겼다.
“여하튼, 그날 내가 루시를 데려가는 게 결정됐고 루시 엄마는 가끔씩 루시 얼굴만 보러 들리는 정도였는데 루시 낳는데 제일 고생한 건 자기 아니냐고, 그러니까 생일날만큼은 꼭 자기한테 보내라고 으름장을 놓더라구. 그건 뭐, 맞는 말이니깐…. 이브날 저녁에 루시 엄마가 루시를 데려가고 다음 날 저녁에 내가 데리러 가는 게 약속이야. 덕분에 나는 내일 저녁까지 한가한 거구.”
레오의 설명에 어느 정도는 궁금증이 풀렸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의문점이 있었다.
“그러면 오늘 왜 그렇게 차려입은 건데?”
“아, 이거 때문에 오해한 거야?”
레오가 제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넥타이에 베스트까지 껴입은 쓰리피스 정장에다 평소 잘 끼지 않는 시계까지. 제가 봐도 좀 유별날 정도로 과하게 차려입기는 했다. 하지만 여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도 그럴게…,
“오늘 회의에 나를 엄청 싫어하는 사람이 나온다길래 일부러 차려입은 거야.”
“…헤에?”
“뭐얏, 그 미묘한 반응은?!”
“아니, 좀 의외라.”
“어떤 점이?”
“음…. 네가 제대로 된 직업을 갖고 있었다는 점?”
이즈미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던 레오가 이어진 이즈미의 황당한 말에 맥이 탁 풀렸는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뒤늦게 이즈미가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유치원에 그런 얘기가 몇 번 나왔거든! 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평일 낮에 매일 루시를 데리러 올 수 있는 걸까, 하고!”
“그래서 나온 결론이 백수였고?”
“…….”
“그리고 또?”
“……기둥서방 아니냔 얘기도 나, 왔지….”
제가 얘기하면서도 민망하여 이즈미는 은근슬쩍 시선을 돌렸다. 레오는 잠시 머리를 뒤를 젖혀 망연히 천장을 바라보다 돌연 정체불명의 소리를 질렀다. 그 괴상한 비명에 놀란 레오냥이 레오의 다리 사이에서 호다닥 도망쳤다. 하지만 그조차도 눈치채지 못한 레오가 다시 팩 고개를 돌려 이즈미에게 억울한 목소리로 따졌다.
“다들 나 보면 엄청 반겨주더니, 속으론 그런 생각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없어보였어?!”
“아니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보통 평일 낮에 유치원으로 마중 나오는 아빠는 없으니깐….”
“내가 얼마나 능력있고 잘 나가는 남잔데!”
이즈미가 어떻게든 레오를 달래보려 했지만 단단히 삐진 듯 레오는 열심히 먹던 것도 멈추고 제 앞의 음식을 젓가락으로 뒤적이기만 하다가 비워낸 술잔을 또다시 이즈미에게 들이밀었다. 그에 군말없이 술을 따르며 이즈미가 어떻게든 레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슬그머니 구슬리듯 속삭였다.
“그래서? 그 능력있고 잘 나가는 남자는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건데?”
“흠흠. 알면 엄청 놀랄걸?”
“헤에. 그정도야? 하지만 날 놀래키는 건 쉽지 않은 텐데?”
슬슬 추켜올리나 싶다가도 은근슬쩍 승부욕을 불태우는 듯한 말까지 꺼내니 머지않아 입질이 왔다. 약이 오른 표정의 레오가 분하다는 듯 이즈미를 바라보다가 결국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라이온 하트 OST!”
라이온 하트. 종영한지 몇 개월이나 지났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기 드라마의 제목이었다. 특히 그 드라마에 나온 삽입곡들은 모두 음원 차트 상위권에 올라섰고 노래방에서 모두가 부르는 애창곡이 되었다. 하지만 갑자기 왜 그 드마라 얘기가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어 의아한 이즈미에게 레오가 말했다.
“거기 나온 노래들 다 내가 작곡한 거야!”
“그 노래들을 한 사람이 작곡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당연하지. 일부러 본명은 숨기고 가명 여러 개를 돌려가면서 작곡 일을 하고 있으니깐. 뭐, 업계 사람들은 알음알음 알고 있겠지만 일반인은 모를만 하지.”
뒤이어 레오는 유명 드라마나 영화들의 제목을 나열했다. 모두 제목만 들으면 자연스레 그 작품의 OST의 멜로디가 떠오를 정도로 잘 만들어진 OST로 유명했던 작품들이었다.
“여기 삽입된 OST들도 다 내가 작곡한 거고.”
“…진짜로?”
“내가 세나한테 왜 거짓말을 하겠어?”
레오가 줄줄이 늘어놓은 노래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던 이즈미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서렸다. 아니, 유명 작곡가가 됐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단순한 헛소문일 줄 알았는데 그게 진짜였다고? 이즈미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레오를 바라봤다. 그것이 만족스러운지 레오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도 새 드라마 OST 의뢰를 받아서 그거 관련해서 회의하러 간 거야. 근데 그 왜, 예전에 파라다이스란 드라마에 나왔던 모델 출신 배우가 이번에 주연을 맡게 됐는데 걔가 왜인지 전부터 날 싫어하더라구. 이유는 몰라도 자꾸 사사건건 태클을 거니깐, 기선제압부터 하려고 차려입은 거지.”
“아, 걔라면….”
이즈미는 몇 년 전 크게 화제가 됐던 드라마의 장면을 손쉽게 떠올렸다. 여주에게만 일편단심이었던 서브 남주가 마지막으로 여주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완벽하게 차이게 되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발라드. 시청자 모두가 눈을 쥐어짤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산통을 깨는 발연기가 모두의 눈물을 쏙 들어가게 만들었다. 모델 출신이라 연기가 어색하다는 지적은 그전부터 있었지만 욕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그 순간 나온 절절한 음악과 어색한 연기의 불협화음이 너무나도 인상 깊었기에 그 씬은 박제되어 ‘이 드라마가 남긴 것들’이란 코멘트와 함께 인터넷 상에서 몇 년간 떠돌아다녔다. 레오의 말대로 레오의 가명들이 업계에서는 알려져있다면 그때 그 노래가 레오의 곡이라는 것을 알고 레오에게 악감정을 품은 것이리라. 그 일화를 지금 처음 알게 된 레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좀 어이없네. 그건 네 노래 탓이 아니라 걔가 연기를 잘 못한 탓인건데 애먼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격이잖아. 예전부터 별로 맘에 안 들긴 했지만 그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에, 세나 걔랑 아는 사이야?”
“그냥, 예전에 오디션장에서 몇 번 본 정도.”
“엣? 무슨 오디션?!”
이번에는 레오가 놀랄 차례였는지 눈을 크게 뜬 레오가 이즈미를 휙 돌아봤다. 레오의 꽁지머리가 동시에 폴짝하고 휘날렸다.
“나 중학생 때까지 키즈 모델이었다는 거, 모르고 있었어? 학교에서 다 소문났었는데.”
“몰랐어…. 그런 소문 같은 거엔 별로 관심없었거든.”
레오의 그 말이 이즈미의 심기를 건드렸다. 저는 단 한 번 얘기한 상대를 줄곧 잊지 못하고 있었건만 상대는 자신의 존재도 모르고 있었다는 건 너무 비참한 일이었으니깐. 그래서 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하긴, 게다가 그때는 어렸을 때잖아. 나도 네 이름조차 몰랐으니깐.”
그 목소리가 너무 날이 서있던 탓이었을까, 순간 주변 공기가 착 가라앉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거짓말같이 느껴졌다. 이즈미는 자신이 한 말을 후회하며 어색하게 젓가락을 움직이다 이내 아예 내려놓았다. 먹을만큼 먹기도 했고 이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밥을 먹을 수 있을만큼 신경줄이 두껍지도 못했다. 이즈미가 젓가락을 내려니 자연스레 레오도 접시를 내려두었다. 괜히 저 때문에 레오가 더 먹고 싶은 것을 참는 건 아닌지 싶어 미안한 마음에 그 대신 예전에 선물받고 내내 모셔두기만 했던 와인까지 내놓기로 결심한 이즈미는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레오도 그를 도와 주방으로 빈 접시와 잔들을 옮겼다. 그리고 이즈미가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정리해서 창고에 가져다둔 순간 쨍그랑-,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놀라 주방으로 되돌아온 이즈미의 눈에 저멀리에서 얼어붙어있는 레오와 산산조각난 와인잔, 그리고 어디에 숨어있다 나타난 건지 뻔뻔하게 싱크대 위에 앉아있는 레오냥이 보였다. 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챈 이즈미가 외쳤다.
“레오군!”
“네?!”
갑자기 불린 제 이름에 놀란 레오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뒤로 먀앜, 하는 울음과 함께 우다다다- 레오냥이 도망치는 발걸음 소리가 뒤따랐다. 그제야 아뿔싸 싶은 이즈미가 사색이 되었다. 그 표정에 레오는 그 부름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고양이 왕님을 부르는 호칭이란 것을 깨닫곤 이즈미를 돌아봤다. 뭐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레오가 이즈미에게 한발 다가가며 물었다.
“…냥이 이름, 왕님이 아니라 레오였어?”
“잠깐, 가까이 오지마!”
고양이에게 레오의 이름을 붙인 걸 들키게 된 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즈미에게서 도망칠 기색이 보이자 레오는 사냥감을 궁지로 내모는 맹수마냥 본능적으로 이즈미와의 거리를 줄여나갔다.
“내 이름 같은 거, 모르고 있었다며.”
“…몰라. 기억 안 나.”
“그때부터 줄곧 날 기억해주고 있었던 거구나.”
“그런 거 아니야.”
어떻게 해서든 레오의 말을 부정하려는 이즈미에게 포위망을 좁힌 레오가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 압박감에 견디다 못한 이즈미가 결국 방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레오의 사정거리 안이었다. 레오에게 팔을 붙잡힌 이즈미가 레오를 뿌리치려 했지만 레오의 힘에 이기지 못해 결국 균형을 잃고 우당탕 바닥을 뒹굴고 말았다. 덕분에 이즈미와 함께 바닥을 구른 레오가 이즈미의 위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으윽, 세나. 괜찮아?”
“…얼른 비키기나 해.”
이즈미가 한 팔론 제 얼굴을 가리고 다른 팔로 레오를 밀어내며 답했다. 그 팔 아래 숨긴 표정을 보고 싶어진 레오가 문득 말했다.
“있지, 얼굴 좀 보여줘.”
이즈미는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이런 얼굴만은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즈미는 두 팔을 엑스자로 겹쳐 제 얼굴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절대 싫어.”
“왜? 처음봤을 때도 생각했었지만 세나의 예쁜 얼굴을 가리는 건 너무 아깝잖아.”
“…그때는 마스크 때문에 얼굴도 제대로 못봤으면서 내 얼굴이 예쁜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고.”
“눈만 봐도 예뻤거든! 제대로 예쁘다고도 말했고. 설마 기억 안 나?”
“내가 너도 아니고, 기억 안 날 리가 없잖아!”
울컥 올라오는 짜증에 이즈미가 순간적으로 팔을 내리고 버럭 소리를 쳤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을 타 레오가 이즈미의 양손에 손깍지를 끼며 이즈미의 팔을 벌리며 생긋 웃었다.
“아, 역시?”
유도 신문에 넘어간 것도 모자라 순식간에 두팔이 묶여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된 이즈미의 당황한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맴돌았다. 이즈미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이 손 놔.”
“세나가 직접 빼. 나 지금 손에 힘 하나도 안 줬어.”
레오의 말대로 레오의 손에는 힘이 하나도 실려있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이 손을 먼저 놓을 수 있을까. 레오의 손을 떼어내려는 이성과는 달리 막상 이즈미의 손은 움직이지 않고 그저 손끝만 조금 움찔거렸을 뿐이었다.
“안 뺄 거야?”
웃음기 섞인 레오의 목소리가 이즈미를 놀리듯 물었다. 그에 얼굴은 물론 귀와 목까지 새빨개진 이즈미가 왼팔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손깍지는 여전히 풀지 않은 상태였다.
“…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그리 말하는 이즈미의 목소리는 숫제 울먹이는 것처럼 들렸다. 레오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듯 답했다.
“세나가 솔직해지는 거?”
“지금 나를 놀리는 거지?”
“음, 그런 것도 없잖아 있긴 한데.”
그 말에 이즈미가 눈만 움직여 레오를 쏘아봤다. 하지만 그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런 때마저도 날카롭던 눈초리가 아래로 둥글게 휘는 모습이 참 예뻐보여 다시 한번 자존심이 상했다.
“너무 몰아붙이기만 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할게.”
그리곤 손에 힘을 준 레오가 이즈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을 떼어내 이즈미의 얼굴을 내려봤다. 짙은 녹안에 담긴 감정이 쏟아지듯 내려와 이즈미의 온몸을 적셨다.
“미안해. 세나를 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혼자만 기억하고 있게 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리고 좋아해.”
“읏….”
뒷목이 오싹하고 아랫배가 저릿거렸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 이즈미가 뒤늦게 레오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아까와는 달리 힘이 잔뜩 들어간 레오의 손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어. 내가 준 기회를 내팽개친 건 세나잖아. 단호한 레오의 목소리가 이즈미에게 속삭였다.
“하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예쁘다고 생각했어.”
“그, 만…….”
“다시 만났을 때에도, 세나가 십년 전 그때 그 애인줄 모르는 상태에서도 첫눈에 반했어.”
“하지… 말라니까아.”
애원하는 이즈미의 손 끝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화답하듯 레오도 이즈미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벽안이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그래서, 세나 선생님은 어떤가요?”
“흐윽…. 좋, 아해…!”
“응응. 잘 말했습니다~.”
버티다 못한 눈물샘이 터지는 동시에 이즈미의 마음도 봇물 넘치듯이 터져나왔다. 그런 이즈미의 눈물을 레오가 핥아내며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눈물로 눈앞이 흐린 와중에 이즈미는 헐떡이면서도 몇 번이고 외웠다.
“좋아해…. 흣, 예전부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으흑… 좋, 아했어……!”
“나도,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 그때 난 세나한테 첫눈에 반한 걸거야.”
“거, 짓말….”
“거짓말이 아냐.”
“그럼 왜, 루시….”
“아, 잠깐! 지금 여기서 루시 얘길 하는 거야?!”
이즈미에게 달라붙어 쪽쪽 입을 맞추던 레오가 휙 몸을 일으켰다.
“루시가 없었으면 세나를 다시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런 말 하기 있어?!”
“루시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럼?”
“루시 어머니….”
실컷 울고 나니 조금씩 진정된 이즈미가 훌쩍이면서도 꼬박꼬박 받아쳤다.
“날 계속 좋아했던 거라면 다른 사람을 만났을 리가 없잖아….”
“아니, 그으건… 그녀석을 정말로 좋아한 것도 아니고! 또 지금은 헤어졌잖아, 응?”
“하지만….”
“우리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응? 지나간 얘기는 하지 말자고. 세나도 연애 한번 안 해보고 살진 않았을 거 아냐?”
“…난 안 해봤어.”
그 마지막 말에 레오가 뒤통수를 후려맞은 얼굴로 이즈미를 바라봤다.
“널 좋아한다는 자각은 없었지만, 연애를 해보려고 해도 자꾸 네 얼굴이 생각나ㅅ-, 읏! 우읍….”
이즈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 그 뒷말은 레오에게 삼켜졌다. 입으로 파고들어온 말캉한 살덩이가 제 안을 멋대로 휘저어댈 때마다 절로 허리가 붕 떴다. 머릿속으로 직접 내리꽂히는 강렬한 쾌감에 저도 모르게 이즈미가 발을 굴렀다. 마치 그에게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듯이. 하지만 레오의 손은 이즈미를 단단히 붙잡고서 놓치지 않았다. 달리는 호흡에 버거워하던 이즈미가 결국 스스로 숨을 쉬는 법을 터득하게 될 때까지 집요하게 이즈미의 입술을 맛보던 레오가 겨우 이즈미를 놔주려나 싶었으나 잠깐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지 다시 쪽쪽 입술을 들이밀었다. 그것을 피해 이즈미가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덕분에 희게 드러난 목덜미가 오히려 레오를 부추겼다.
“읏….”
잔뜩 힘이 들어가있던 목에 와닿는 뜨거운 숨결에 놀란 이즈미가 흡 숨을 들이키며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이즈미의 목덜미와 귓가에 입술을 지분거리던 레오의 입술이 점차 이즈미의 턱선을 따라 위로 올라가다 마지막, 뾰족한 턱끝을 혀로 느리게 핥아올렸다. 이즈미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조각난 숨결이 제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는 느낌에 눈앞이 핑글 돌았다.
“이, 제… 그만, 흐읏….”
“이제부터 시작인걸.”
온몸을 발발 떨고 있는 이즈미를 달래려는 듯 레오가 깍지 낀 손을 들어올려 이즈미의 손가락에 짧게 입맞췄다. 그리곤 손가락부터 시작해 손등과 손목을 타고 점차 내려온 입술이 이즈미의 옷자락 사이로 파고 들려는 찰나,
“레, 오군… 제발…!”
이즈미가 신음같은 비명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애원은 레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대신 다른 곳에서 반응이 왔다. 이즈미가 목소리를 높일 때에는 냉큼 도망친 주제에 제 이름만은 귀신같이 알아듣고서 어느새 다시 돌아온 레오냥이 웨웅, 울며 레오의 머리를 발로 꾸욱 눌러댔다. 그 손길인지 발길인지에 당황한 레오가 이즈미에게서 멀어졌다.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게 된 이즈미가 레오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오군….”
제가 아닌 고양이를 보며 제 이름을 부르는 이즈미의 목소리가 저를 부를 때보다도 다정하게 들려 레오는 조금 심통이 나 이즈미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즈미의 뺨에 얼굴을 부비는 레오냥과 눈을 살짝 감은채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즈미의 얼굴을 보니 그저 피식피식 웃음만 새어나왔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그러고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고개를 들어 방안 구조를 얼핏 확인한 레오가 이즈미의 손을 놓고 대신 제 목을 두르게 만들었다. 갑자기 자유를 얻은 것에 놀란 이즈미가 레오를 쳐다보자 레오가 빙글 웃어보였다.
“손에 힘 꽉 줘.”
그리곤 이즈미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 이즈미의 허리 아래로 팔을 쑥 밀어넣고는 그대로 붙들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팔다리로 레오를 끌어안은 이즈미가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발버둥치려 했다. 하지만 팔을 움직여 안정적으로 이즈미를 들쳐안은 레오가 그보다 한 발 먼저 선수를 쳤다.
“지금 떨어지면 레오군이 다칠 거야.”
그 말에 시선을 옮기니 어느새 레오의 발치까지 다가온 레오냥이 보였다. 이즈미는 분해하는 표정으로 레오를 내려다봤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글쎄? 세나가 한 번 맞춰봐. 이제는 알 거 다 아는 어른이잖아?”
이즈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말하는 레오의 발이 침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 안 그래도 빨갛던 이즈미의 얼굴이 거의 불타오르듯 달아올랐다. 어떻게든 도망칠 길을 찾던 이즈미는 레오냥이 저들을 따라오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 다급히 레오냥을 불렀다.
“레오군! 이리와!”
“응응. 레오군이라면 여기도 있으니깐 그쪽 레오군은 안 와도 돼~.”
이즈미의 턱 끝에 쪼듯이 입맞춘 레오가 그리 대꾸했다. 그리고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 마냥 레오냥을 이즈미를 따라가는 대신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제 털을 핥는 데에 집중했다. 제 유일한 희망이 저에게 관심도 없는 것에 좌절한 이즈미는 결국 레오에게 안긴 채 침실 문이 닫기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즈미는 진짜로 ‘알 거 다 아는’ 어른이 되었다.
*
“있죠, 세나 선생님은 레오군 좋아해요?”
새해가 시작되고 유치원의 짧은 겨울 방학마저 끝이 나 일주일만에 보게 된 루시가 이즈미를 보자마자 예의, 다른 사람에게도 다 들리는 귓속말로 한 말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아침부터 제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을 마주한 이즈미는 순간 그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루시를 유치원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온 레오도 그 옆에서 멍청한 얼굴로 대담한 발언을 꺼낸 제 딸내미를 바라봤다. 하지만 두 어른의 당황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루시는 얼른 대답하라는 눈빛으로 이즈미를 올려다봤다. 이즈미가 힐끗 레오를 살폈다. 덕분에 눈이 마주치자 레오가 생긋 웃어보였으나 이즈미는 얼른 눈을 돌렸다.
재회하자마자 단번에 진도를 빼버린 데다 지난 일주일 간 시도때도 없이 연락을 하는 레오에게 적응하지 못해 제대로 된 답장도 보내지 못하고 어색함에 몸부림만 치던 이즈미에겐 참 민망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식 앞에서 부모를 욕할 수도 없던 지라 이즈미는 레오의 눈치를 보며 어물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안도한 표정을 지은 루시가 여전한 귓속말로 말을 이었다.
“다행이다! 있죠, 레오군이 방학 내내 집에서 자꾸 세나 선생님 얘기만 하는 거에요. 아마도 세나 선생님이 너무 이뻐서 레오군이 반했나봐요!”
루시의 폭로에 더 당황한 쪽은 이즈미였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레오는 짐짓 루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척 먼산만 보고 있었다. 이즈미가 루시에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차, 루시가 마지막 결정타를 넣었다.
“그러니까 세나 선생님. 레오군이랑 결혼해주세요!”
그 발언에서야 레오도 당황하여 루시를 돌아보았다. 딸내미에게 프로포즈의 기회를 빼앗기다니,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굳어버린 레오가 뭐라 하기도 전에 루시가 덧붙였다.
“꼭이에요, 꼭! 알겠죠?!”
그리고 이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남겨질 두사람의 심정을 이해할 만한 나이가 아닌 루시는 도도도도, 먼저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우두커니 남겨진 두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레오였다.
“큼…. 그래서 진짜로 결혼해줄래요, 세나 선생님?”
민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세를 타고 은근슬쩍 이즈미를 꼬시려는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런 레오를 흘겨보며 이즈미는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헛소리하지 마시죠, 루시 아버님.”
그러나 그리 대꾸하는 이즈미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민망함에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치듯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이즈미의 뒷모습에 레오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론 몇 번이나 깍지를 끼고 입 맞추었던 손가락의 둘레를 가늠하던 채였다는 걸 이즈미는 알지 못했다.
<후기>
주의) 이거슨 살림 1도 못하는 공을 수가 뒷바라지하는 내용만 주구장창 나오는 싱글대디×유치원교사물에 질린 최티나가 울분에 차서 쓰기 시작한 글로, 처음엔 육아살림에도 천재적인 천재만재작곡가 레오파파를 백수기둥서방으로 오해한 세나선생님과 그런 세나선생님에게 첫눈에 반해서 쫓아다니는 츠키나가부녀의 대환장로코물로 기획됐었으나 최티나의 기량부족과 취향문제로 싱글대디랑 유치원교사 설정은 별 쓸모없어지고 과거인연 mgs만 잔뜩 쳐진 글입니다.
......뭔놈의 설명이 이리도 길지 싶겠지만 자기 자신에게 변명을 좀 하고 싶엇슴니다..ㅋㅋㅋㅋㅋㅋ 이게 원래 이런 내용이 아니고 세나선생님에게 싱글대디의 매력(ㅋㅋㅋ)을 잔뜩 어필하는 가벼운 로코물이었는데 어쩌다 일케 됏는지(쩜쩜쩜
후... 변명은 이미 위에서 다 썻으니 그만 말하고 마지막으로 늦었지만 이박님 생일 축하해~~!!(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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